[詩] 🕰️ 의리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한때는 믿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고.

한 회사, 한 팀, 한 자리에서
함께 꿈을 꾸고, 함께 불을 지피자며
라면 하나 나눠 먹던 야근이 있었다.

“형, 이건 제가 할게요.”
“누나, 무리하지 마요.”
의리, 그 따뜻한 단어는
야근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했다.
비상등 같은 말 한 마디,
그게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배는 갈라졌다.

 

똑같이 있던 사람은
승진해서 나의 평가표를 들고 섰고

 

“같이 욕하던 그 사람”은
이젠 고개를 뻣뻣이 든다.

속으론 "지금도 이럴 거야?" 싶지만
겉으론 “네, 알겠습니다.”

 

웃음기를 억지로 끌어다 입가에 붙인다.
의리는 사라졌고,
이젠 웃는 것도 연기다.


회의는 여전히 길고,
보고서는 사라진 책임을 찾는 

추궁문서가 되었고
동기라는 말은 

이직 알림에서나 들려온다.

텅 빈 복사기 앞에서,
커피를 따라놓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한때는 일에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이 월급이 내 삶을 간신히 떠받든다.

존버 — 존재를 위한 버팀.

"Sustinere ut vivas."

세네카 (Seneca)

 

나는 지금
이 회사에 충성하는 게 아니다.

 

내 식탁에 올라갈 한 끼를 위해,
내 아이의 학원비를 위해,
부모님 약 봉투를 채우기 위해,
이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이다.

눈치 주는 선배보다,
입 다무는 후배보다,
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무너져버릴 내 마음 한 칸이다.

그래도, 나는 남는다.
의리는 떠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식은 커피를 다 들이키고,
보고서를 다시 열며 생각한다.
"오늘도 잘 버텼다."
누군가의 칭찬이 아니라
내가 나를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이 시를 왜 쓰는지 안다면
여러분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의리義理가 사라진 자리에,
존버라는 말이 자라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내일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

 

- 데이터 마법사 -